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항에 따라 내부 그래픽 작업을 맡은 채병록 디자이너는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확고히 하며 오늘날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단연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인다. 특히 한국적인 것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은 그의 화려한 스타일뿐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디자이너에 대한 가치와 역할을 달리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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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의 ‘아트 포트 프로젝트’ 작업이 화제입니다.
프로젝트명 ‘아트Art+에어포트Air Port’에서 보듯이 공항이 아트적 요소와 만날 때 어떤 역할과 모습이어야 하는지부터 고민했습니다. 거기에 누군가 보았을 때 ‘한국적인 이미지’라고 느꼈으면 했죠. 요청받은 공간이 무척 길고 복잡하다 보니 작업을 시작하기 전, 공간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조형적인 부분도 물론 중요했지만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한 스토리라인을 잡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죠. 한편 새로운 여객터미널 개항에 맞춰 정해진 시간 안에 마무리하기 위해 구역별로 나누어 그래픽 작업과 시공을 동시에 진행했습니다. 제가 맡은 부분이 500m 길이에 달하는 만큼 출력물 무게만 약 1톤에 육박했죠. 현장 시공에 필요한 커팅 시트 작업에도 많은 분이 함께 했는데, 그래픽 작업 이상으로 설치 영역에서 험난했던 프로젝트로 기억에 남을 듯합니다.
복(福), 바람의 색동(Good Luck & Colorful Wishes)’,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4단계 ‘아트 프로젝트’, 2024 / 위 사진 채병록 제공
2024년 12월에 문을 연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확장 구간 일부, 총 18개 구역에 아트 파빌리온(총길이 약 1930m, 총면적 8000㎡) 작업을 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채병록 그래픽 디자이너와 존원Jonone 어반 아트 아티스트가 참여했다. 그중 채병록 디자이너는 민화에서 발견한 그래픽 모티프를 활용해 공항을 찾는 방문객에게 격려와 기원의 의미를 담아 ‘복福, 바람의 색동’ 작업을 선보였다.
여행만이 공항을 방문하는 이유는 아니지만 먼 곳을 향해 떠난다는, 또는 먼 곳에서 떠나와 도착했다는 설렘은 방문자 대부분이 가지리라. 이번 프로젝트 장소는 출국장인 만큼, 먼 길을 떠나는 이들의 안전을 바라며 우리 문화의 ‘복’을 기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지난해 연말에 이어진 국가적 악재는 이러한 채병록 디자이너의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보는 사람들이 평안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이 사회,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한 고민까지 작업에 담고자 했다.
채병록 디자이너의 요즘 작업에는 협업도 늘리고 있다고요.
개인 작업을 주로 하던 이전과 달리, 중년에 접어드는 나의 상황을 포함해 이제는 혼자 모든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변하는 듯합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경우도 시공 같은 일부 물리적 부분을 도와준 분들이 계시고요. 물론 그렇다 보면 포기하거나 내려놓아야 하는 부분도 생기기 마련이죠. 그런 과정이 저를 더 성숙하게 만드는 것도 같습니다. 시야가 넓어지고 깊이가 달라지는 것에 따라 어떤 의문도 생기지만 저 개인에게는 고무적인 현상이라 생각하려고 합니다.
채병록 디자이너는 대학 졸업 후 국내 유수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근무하다 조금은 늦은 나이에 돌연 일본 유학을 떠난다. 그는 유학 후 ‘자기 주도적 작업’이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연하장에 담아 가까운 지인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연하장 문화는 물론 우편으로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것이 거의 사라진 요즘,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새롭게 느껴지며 조용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자기 주도적 작업’이라는 표현이 재밌습니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고, 누군가의 의뢰가 있어야 움직이는 게 일반적이죠. 그렇지만 지금 세상은 직업이라는 게 딱 규정 지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요즘 디자인업계 상황이 좋지 않지만 국내 디자인 스튜디오를 오래 경험했기에 뭔가 다른 방법을 찾고 싶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자주 작업’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내가 팔고자 하는 물건을 갖춘 가게를 만들어놓고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방식을 뜻합니다. 손님이 오게끔 간판도 달고, 뭐 그런 추상적 개념인 거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준비해놓고 그것을 원하는 손님이 나를 찾아오게끔 하자는 것입니다. 유학 후 홀로서기에 대한 것이자, 선영업의 차원이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불안함과 촉박함, 그런 느낌 없이 내가 직접 할 수 있고, 관련 업을 해본 경험이 있어 실수도 적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연하장 프로젝트도 그 일환이겠네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한국 사회의 큰 화두 중 하나가 온라인상의 부정적이거나 악의적인 평가였습니다. 유명인의 사고도 잇따랐고요. 익명으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이 큰 소모잖아요. 누군가는 말로, 글로 이러한 현상에 의견을 낸다면, 저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할까요. 지금은 연하장을 주고받는 이가 적지만 그렇다고 또 없어진 것은 아니에요. 여전히 많은 한국인이 새해가 되면 어디선가 구한 ‘복’이라는 글자를 액자에 걸거나 냉장고에 붙이거나 하죠. 그렇게 하나둘 만들어 가까운 지인들에게 선물로, 인사로 보냈는데, 많이 좋아해주고 일적으로도 저를 찾아주었습니다.
“누군가는 말로, 글로 현상에 의견을 낸다면, 저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인천국제공항 작업의 핵심 주제도, 연하장의 콘셉트도 ‘복’을 전한다는 것인데요.
‘복’이라는 것이 한국만의 문화는 아니에요. 동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에 있는 개념이죠. 저는 그것을 좀 더 한국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고요. 이와 관련한 아이템도 여럿 있죠. 복조리 같은 것도 있고요. 저는 그런 소품을 떠올리며 그래픽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레트로가 다시 유행하며 제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늘어났죠.
‘한국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래픽 작업의 밀도가 상당합니다.
우리 사찰의 탑을 보면 ‘쌓아 올린다’는 행위를 떠올리게 돼요. 어쩌면 인간의 본질적인 행위일 수 있죠. 아이들이 장난감을 쌓아 올리는 것도 그렇고요. 저는 우리의 민화, 문자, 제사상 음식 등에서 많은 힌트를 얻는데, 작은 면과 패턴이 쌓이고 풀리고 하는 반복적 움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 작업도 그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고요.
많은 이들에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각인시켰는데, 개인적으로 그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왔다고 보나요?
아버지가 건축가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가장 많이 보고 자란 것이 건축 도면이었죠. 그때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제도기, 청사진 같은 것이 저에게는 자연스럽게 존재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후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제 나름대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마주한 선과 면의 반복이 일종의 문자처럼 다가왔는데요. 마치 도면화된 이미지가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성됐다고 할까요.
‘각의 온도(Tempered Angles)’, 금속공예 작가 이준희 개인전 포스터, 600x9002㎜, 2023
‘문방청완(文房淸玩)’, “Books & Things : 물아일체”전, 1150x2300㎜, 1000x1400㎜, 2022
‘축첩도(築疊圖)’, 국립현대미술관 “생의 찬미”전, 1450x2050㎜, 2022
채병록 디자이너는 한국의 전통과 문화에서 발견되는 심벌을 찾아 이를 그래픽으로 표현해왔다. 복을 담은 연하장으로 시작해 제사상의 다과로, 그리고 탑 같은 조형물로 그 대상을 옮겨갔고 인천국제공항 작업을 통해 화려한 복의 향연을 선사했다. 그는 건축 도면의 구조와 상징성으로부터 아이디어 도출의 실마리를 얻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이제 자연스럽게 기술의 발달과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있다. 생성형 AI 기술이 상용화되며 디자인 작업 또한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불가피한 오늘날의 현실에서 두 영역 간의 조화를 고민한다.
생성형 AI 기술을 쓰는 오늘날의 디자이너는 또 어떻게 그 역할을 이해해야 할까요?
편집자이자 조합자가 돼야 합니다. 어떤 이슈를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죠. 관찰을 잘하면 세상의 모든 일을 잘할 수 있습니다. 집을 짓는 것도, 아이를 돌보는 것도 관찰에서 나온 요소의 조합에 의한 것이니까요. 저도 일하면서 무엇을 그리는 것보다 대상을 관찰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려고 하죠. 조합이라는 것은 더 많이 모으고 쌓겠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더 필요한 것만 취하겠다’는 것과 연결되죠. 강의할 때도 학생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레퍼런스를 찾는 이유는 레퍼런스를 피하기 위해서다”라고 말이죠. 그렇기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조합하는 게 아닌, 없던 것을 생성해내는 것이 새로운 조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요.
기술로 대체될지 모를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요?
미학적 부분을 놓치면 안 되겠지만 저 역시 디자이너로서 변화하는 풍토에 너무 무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AI 기술과 디자인 또는 크리에이티브를 엮은 많은 채널과 정보가 유통되고 있습니다. 그들만 보면 당장이라도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사라질 것만 같죠. 하지만 제 관점에서 보면, 그 결과물이 아직까지는 딱히 ‘멋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소란스러울까’ 하는 생각마저 들고요. 현재는 기술이 시작되는 단계로 보이고, 디자이너는 이를 활용해 다시 디자이너의 가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AI 기술을 활용할 때도 ‘인간적인 관계로 부탁해야 된다’라는 말씀이 재밌습니다.
제가 AI 관련 프로그램을 사용하며 명령을 입력하는 프롬프트에 이성적이고 건조한 말투를 삽입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았어요. 한번은 존대까지 하며 정중하고 자세한 어투로 입력을 해보았죠. 말투로 인해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내 입장에서 그 결과를 수용하는 관점이 조금은 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 제가 외부 전문가들을 팀으로 꾸려 일을 하게 되면 그들이 저에게는 일종의 AI일 수도 있는 것이죠.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인간적’이라는 말에 나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일이 아니더라도 학교의 학생에게 나보다 나이가, 직급이 낮다고, 또는 사회에서 나보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막 대하고 무시하고 과시하면 안 되는 것이죠. AI가 비록 무형의 기술이지만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을 해줄 거라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이를 다루다 보면, 결과물과 나 자신에게도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만인의 복을 기원하듯, 너무 긍정적인 바람일까요.(웃음)
Text | CH
Photos | Peace Pi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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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디랜드 Brody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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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김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