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주택은 빛만큼이나 소리로 가득 차 있다. 현대인은 빛과 비슷한 비중으로 간절하게 소리를 원한다. 현대인은 소리 없는 세상을 무료하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무서워하기까지 한다. 대가족 시대에는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오면 집 안이 환하고 가족들 소리로 가득했다. 일하는 여자들의 소리,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로 말이다.
본 사진은 2020년 6월 “VILLIV” 매거진에 실린 ‘혼자가 좋지만 외롭고 싶지 않은 이를 위해’에서 발췌했습니다.
집에서 일하면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음악 형태는 컴퓨터에서 재생되는 디지털 음원이다. 그때 외출했던 아내가 들어오며 “음악 소리 좀 낮춰, 밖에서 다 들려” 하는 거다. 내가 그렇게 크게 틀어놨나? 나는 볼륨을 낮추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컴퓨터에 연결된 스피커는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다. 그런데 현관 밖에서 들릴 정도로 그 소리가 웅장하다는 이야기인가? 그러고 보면 기계를 통해 인공적으로 재생된 음악 소리는 점점 더 발전한 것이 사실이다. 어렸을 때는 라디오로 음악을 들었다. 그 소리가 대단하지는 않았다.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친구가 전축(옛날에는 오디오 시스템을 전축이라고 불렀다)으로 교향곡을 들려주었다. 나는 마치 커다란 뮤직홀에서 음악을 듣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예술 작품의 아우라aura를 느꼈다고나 할까. 언제나 첫 경험은 고유하고 특별한 법이다. 요즘은 기술이 발전해 블루투스 스피커도 꽤 훌륭한 음악 소리를 들려준다. 음악은 영상이 있는 엔터테인먼트와 달리 일을 하면서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내 집의 공간을 가득 채웠던 것 같다.
집 안은 기본적으로 물리적 형태를 이룬 것들로 채워진다. 가구와 전자 제품, 그리고 사람과 반려동물이다. 하지만 집 안을 채우는 것 중에는 형태가 없는 것도 있다. 빛과 냄새, 소리다. 빛은 잠잘 때를 제외하면 늘 집 안을 채운다. 냄새는 음식을 먹을 때만 공기를 장악한다. 소리는 어떤가? 나는 현대의 주택은 빛만큼이나 소리로 가득 차 있다고 확신한다. 현대인은 빛과 비슷한 비중으로 간절하게 소리를 원한다. 현대인은 소리 없는 세상을 무료하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무서워하기까지 한다. 대가족 시대에는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오면 집 안이 환하고 가족들 소리로 가득했다. 일하는 여자들의 소리,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로 말이다.
하지만 핵가족 시대의 집은 늘 적막하다. 사람들은 집에 들어와서 흔히 불을 켜는 것과 동시에 TV를 켠다. 오늘날에는 TV 대신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이 늘어났지만 본질적으로 소리를 재생시킨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대가족 시대와 달리 집에 들어와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을 때 집은 쓸쓸하다. 이 적막과 쓸쓸함을 깨려면 빛으로는 부족하다. 소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현대의 주택은 전자 기기의 도움으로 인공적인 소리를 채울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TV를 켜거나 오디오로 음악을 재생시켰을 때 대부분 느슨한 감상을 한다. 일하면서 그냥 소리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 소리의 목적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것은 집중해서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외롭지 않게 공간을 채우려는 것이다. 마치 집 안에 가족이 가득 찬 것처럼 말이다.
‘산수시에서 열린 프리드리히 대왕의 플루트 연주회’, 아돌프 멘첼, 1850~1852년. 귀족 사회의 실내악을 묘사한 그림으로 드물고 값비싼 감상이다.
초기 음악 재생기인 축음기를 듣고 있는 여성, 1902년 / ⓒEdith Irvine
라디오를 듣고 있는 가족, 1921년 / ⓒHarris & Ewing, photographer
기계로 재생하는 소리가 없던 시절, 소리는 사람이 말을 할 때만 공간을 채웠다. 또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바람 소리, 새소리, 빗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다. 이웃집에서 싸우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음악 소리나 노랫소리처럼 예술적 형식을 갖춘 소리가 들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소리를 재생하는 기기가 없던 근대 이전에 음악을 감상한다는 건 아주 귀한 경험이었다. 당시는 일주일 내내 음악을 듣지 못했다. 그러다 일요일에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가서 비로소 음악, 즉 예술적 소리를 경험하게 된다. 그 소리가 주는 감동을 현대인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언제든지, 심지어는 이동하거나 운동을 하면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음악 감상의 희소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근대 이전 사람들은 성당에 들어서서 그 거대한 공간을 가득 채운 음악 소리를 들었을 때 하늘나라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극소수의 귀족과 부유한 상인만이 연주자를 집으로 불러 음악을 들었다. 이렇게 실내악이 탄생했지만 상류사회 사람도 현대의 평범한 서민이 하는 것만큼도 빈번하게 음악 감상을 하지는 못했다.
소리는 언제나 덧없이 공중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음악은 ‘지금, 여기’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극도로 드물고 비싸고 귀한 체험이 아닐 수 없었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그런 고유하고 유일한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 작품에는 ‘아우라’가 있다고 정의했다. 베냐민은 기본적으로 회화나 조각 같은 시각예술 작품에서 경험하는 아우라를 사례로 들었지만, 음악 역시도 아우라의 대상이다. 어쩌면 회화나 조각과 달리 물리적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음악은 아우라가 더욱 강하다. 즉 ‘지금, 여기’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절대적 아우라인 것이다. 복제 기술이 없던 시절의 사람들은 성당이나 극장이라는 특별한 장소에 가야만, 그리고 그 시간에만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 경험은 경이로웠고 아우라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회화와 조각은 사진이라는 복제 기술의 발명으로 아우라가 붕괴되었다. 현대인은 사진으로 복제한 예술 작품을 책으로, 또는 벽에 붙여 쉽게 감상했고 이제는 디지털 미디어로 언제든지 볼 수 있다. 음악 역시 바이닐, 자기테이프, 디지털 저장 매체, 그리고 소리를 재생하는 오디오 같은 복제 기술과 재생 기술의 발전으로 음악의 아우라가 사라졌다.
소리의 복제 기술은 시각 매체의 복제 기술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시각 매체로 복제된 예술 작품은 그것을 집중해서 봐야만 감상할 수 있다. 음악은 어떤가? 음악은 소리이고 소리는 공간을 채운다. 그러니 그 공간 안에서는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필연적으로 들려온다. 그러니 음악은 능동적으로 듣는다기보다 수동적으로 들리는 것이다. 그런 느슨한 감상은 왜 필요할까? 그것은 가족 구성의 변화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초기 음악 재생 장치는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오디오 시스템으로 음악을 듣는 것은 귀한 경험이었다. 아우라가 아직 덜 붕괴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친구 집에서 전축으로 교향곡을 들은 것은 명백한 아우라 체험이었다. 하지만 21세기가 되어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 특히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오디오 시스템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음악의 아우라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음원을 소유조차 하지 않고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다. 즉 그 경험이 드물지 않고 저렴해진 것이다.
“소리를 채우는 데는 한계가 없다. 적막하고 쓸쓸한 집 안을 마치 가족이나 친구가 옆에 있는 것처럼 채워주면서 나를 위로해준다.”
이렇게 소리의 복제 기술과 재생 기술이 발전하면서 가족 구성은 어떻게 변화해왔을까? 라디오가 발명된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가족들이 커다란 라디오 주위에 모여 전파로 전달되는 드라마와 음악을 듣는 것은 흔한 풍경이었다. 이 시대만 해도 한 집에 최소 다섯 명의 식구가 있었다. 이조차 그 이전 시대와 비교하면 핵가족이지만 말이다. 20세기 후반까지 소리를 들려주는 오디오 시스템과 TV는 집 안에서 가장 비싸고 소중한 물건으로 대접받았다. 21세기가 되자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개인 미디어로 음악이나 영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제 한 가구의 구성원이 4~5명이면 많은 축에 든다. 1인 가구의 비율이 40%에 육박하고 있다. 1~2인 가구는 65%다. 가족 구성원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과 비례해 소리의 복제 기술과 재생 기술은 더 쉽고 간편해진 것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물론, 나처럼 아내와 아들이 있는 3인 가구도 집 안에 혼자 있을 때가 많다. 현대인은 쓸쓸하고 적막한 집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집 크기도 줄어들고 있다. 그런 집 안에 가구와 전자 제품처럼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물건으로 채우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하지만 소리를 채우는 데는 한계가 없다. 게다가 말없는 물건과 달리 소리는 적막하고 쓸쓸한 집 안을 마치 가족이나 친구가 옆에 있는 것처럼 채워주면서 나를 위로해준다. 그 소리가 꼭 음악만은 아니며 유튜브에서 구독하는 방송일 수도 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듣고, 샤워를 하면서도 듣고, 작업을 하면서도 듣는다. 어떤 때는 잡음 같기도 하지만 현대인은 소리가 끊어지는 순간을 점점 참기 힘들어졌다. 그것은 마치 근대 이전 대가족 시대, 일하는 사람들 소리와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던 집 안을 추억하는 것 같다.
Text | Shin Kim
30
언커먼하우스 정명희, 정영은, 강희철
13
김선아 , 윤광준
27
문인영